우리나라에서 이리도 많은 애니메이션들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두달전까지만해도 전혀
몰랐던 필자는 그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심히 놀랬었는데, 그들에 대한 논의의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씁니다.
물론 많은 시간과 자료를 바탕으로 쓰는 글이 아니기에 그 전문성이 떨어지기는 하겠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정리를 해두는 것이 필자 본인에게도 필요할 것 같아서 이 작업을 합니다.
필자는 영화에 뜻을 둔 사람이고 이제 막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제 자신의 애니메이션도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여러 선배님들의 작품들을 분석한다는 것은 제 자신의 작업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아니 거의 알아주지 않는, 게다가 돈도 안되는 작업을 오늘도 혼자 골방에서 열심히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계시는 한국의 모든 애니메이터들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너무 거창하군요. 하지만, 누군가가 왜 이런 글을 쓰느냐고 묻는 것만 같아서 괜한 소리들을 지껄여봤습니다.

내러티브에 익숙해 있는 필자가, 내러티브보다는 이미지와 느낌들의 몽타쥬가 주조를 이루는
전승일의 작품을 분석하는 데에는 다소 어려움과 불편함이 있었지만, 전승일의 작품은 한국의 다른 단편 애니메이션들과는 다르게 짙은 사회성을 지니고 있으며, 작품마다 조금씩 변화되는 기법들을 보여주고 있어 필자에게는 분석과 공부의 여지를 많이 주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데 필자가 감상한 전승일의 작품은 모두 네 편입니다.
그것은 <내일인간>, <연필이야기 2>, <순환>, <사랑해요> 등 인데, <연필이야기 1>도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아쉽게도 아직 감상하지를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네 편만으로도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냥 씁니다.

<내일인간>은 실사 촬영된 그림들을 이용하였고, <연필이야기 2>는 아주 깔끔하고 단순한 그림을 보여줌으로써 애니메이션에서 그림이 차지하는 비중을 크게 줄여놓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엄살과 과장이 제거되고 감정이 절제된, 담백하고 간단 명료한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지금 우리나라 단편 애니메이션들 중에는 모호하고 빈약한 주제의식을 현란한 이미지들로 마구 덮어버리려는 작품들이 많아 보여 아쉬운 느낌을 많이 받고 있던 터였습니다.
<순환>에서는 다큐멘터리의 장면들을 직접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사랑해요>에서는
그 다큐멘터리의 장면들에다가 실제 아이들이 그린 그림들을 대비시켜 표현하였습니다.
기법상으로 이것 저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들입니다.
이제 제작된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내일인간>, 94년

내일, 우리 인간들의 모습은 방독면을 쓴 채 거리를 걷고, 서울 상공에 핵폭탄이 터지는 그런 것이다. 사이사이 인써트되는 개발의 모습은 인간들을 그렇게 황폐화시킨다는 경고의 메시지다. 방독면을 쓴 사람이 걸어가고 있고 도시가 건설되고 있다. 폐수와 쓰레기 더미는 계속 쌓여가고 방독면을 쓴 사람은 거울 앞에서 자신을 성찰한다.
그 성찰은 절망적으로 끝났음이 분명해 보이는데 자신이 바로 그 건설의 주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건설한 것에 의해 자신이 상실되어가는 모습, 결국 자신의 아이들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을, 그런 인간 행위들의 부조리한 모습이 여기에 담겨 있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그의 97년작 <순환>에서는 하나의 인류학적 성찰로 보여지기도 한다.
방독면의 사나이는 절망적으로 계속 걷고 결국 미사일은 발사된다.
마침내 서울 상공에서 핵폭발이 일어나고 그 버섯구름은 아이의 눈동자로 대치되며 작품은 끝난다. 이 마지막 장면은 이후 전승일의 작품세계를 예시하는 중요한 장면이 된다.
이후 그의 작품은 공해문제를 넘어 핵문제, 전쟁, 더 나아가서는 인간 본연의 폭력성까지 다루고 있는데, 그것들을 바로 아이의 시선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을 이루는 핵폭발과 아이의 모티프는 이후 그의 작품들에서 일관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아이의 이미지는 결국 그의 그림 스타일까지 바꾸어 놓았다.
<연필이야기 2>에서부터는 마치 초등학생이 그린 듯한 분위기의 그림들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이러한 스타일은 이후 <순환>과 <사랑해요>까지 이어지는데, <사랑해요>에서는 실제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직접 이용하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내일인간>은 전승일의 이후 작품들의 근거와 단서가 되는 작품인 것이다.
<내일인간>에 나타난 그밖의 도시건설의 이미지나 실사 영상의 사용 등도 역시 이후 작품들에서 중요하게 드러난다. 공장의 매연이 화면 가득 덮어 버리는 장면은 <연필이야기 2>에서는 그대로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미대 출신의 작가답게 이 작품은 그의 이후 작품들과는 비교될 정도로 회화적인데,
동시에 실사 영상에 덧칠을 하여 매우 사실적인 인물의 움직임을 얻고 있기도 하다.
동물들은 빌빌 기고, 셀러리맨 복장의 인물들은 저마다 방독면을 쓴채 다니고, 그 방독면의 사나이들은 점점 많아지고, 건설은 계속 되고, 결국 핵무기는 터지고마는데,
그렇다면 제목이 <내일인간>인 것은 우리가 내일도 계속 인간일 수 있을까,
또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자문하며 반성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핵폭발을 지켜본 아이의 커다란 눈동자를 보여주면서 말이다.

神은 시골을 만들었고
인간은 도회를 건설했다

神은 망했다 - 이갑수의 시, <神은 망했다> 전문

<연필이야기 2>, 95년

매우 독특한 음악이 먼저 관심을 끈다. 이어 연필이 하나 등장하여 새마을 운동을 하듯 열심히 매우 빠르게 공장들을 건설한다. 공장을 건설하는 것이 연필인 것은 60, 70년대 우리나라 경제성장을 주도했던 기형적인 교육열을 은유하는 듯도 하다.
아무튼 공격적 국가경영의 모범 답안처럼 재빠르게 수많은 공장들을 건설해 놓은 그 연필은 의기양양하게 자랑스런 산업 역군처럼 프레임 아웃하지만, 이내 문제는 발생하고 만다.
<내일인간>에도 잠깐 등장하는 장면이지만, 공장들은 저마다, 더러운 정치인들을 토해내듯,
시꺼먼 매연을 내뿜기 시작하는 것이다. 급기야 화면 전체가 시꺼멓게 뒤덮혀 버렸다.
그러나 여기서 좌절할 우리의 연필이 아니다. 구석에 구멍을 내어 위장취업하듯 잠입에 성공한 연필은 그 시꺼먼 매연들을 일거에 제거한다. 마치 사도를 소멸시키는 에바처럼 말이다.
이 때 연필은 지식인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인가?
그렇게까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주인공이 연필인 만큼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한데,
사실 그 주인공 연필이라는 것이 아이들이 쓰는 몽땅 연필이고 보면, 우리 아이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상기시키는 듯도 하고 아이들이란 곧 희망의 상징이기도 하니,
그 연필은 우리들의 미래요 희망인 아이들일 수 있겠다.
혁명에 성공한 그 연필은 이제 과거의 과오를 깨끗이 씻고자 열심히 녹지사업은 펼친다.
한 그루의 커다란 나무를 멋드러지게 그리는 데 성공한 연필은 폴짝폴짝 뛰며 뒷풀이를 하고
나무 아래에서 새근새근 달콤한 휴식을 취한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연필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도 같다.
이 연필은 자신의 과오를 빨리 깨달았기 때문에 나무 아래서 그렇게 편하니 쉴 수 있었으리라.
그 연필이 다 달아 없어져도 그 옆에는 수만 개의 연필을 만들 수 있는 나무를 심어 놓았으니,
얼마나 마음이 편할꼬. 그러고 보면 매우 사려깊고 현명한 몽땅 연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에 이런 훌륭한 연필은 현격히 부족하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전승일은 다음 작품에서 현실적 문제들을 다시 직접적으로 다루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그 놈의 시꺼먼 매연들이 아직 다 제거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아쉬운 점이라면, 공장을 그리고 색칠을 할 때 그림과 사운드의 싱크가 완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필이 검은 흑심 하나로 여러 가지의 색을 내고 뒤에 지우개가 달려 있지도 않으며 그래서 지울 때도 그 검은 흑심으로 지운다는 설정이다.
이러한 설정은 어린 아이가 보았다면 분명 강하게 의구심을 드러냈을 대목이다.
검은 흑심 하나에서 어떻게 그런 많은 색깔이 나와요? 하고 말이다.

<순환>, 96년

인간의 폭력의 역사가 반복적으로 순환됨을 보여준다. 곧 순환은 수난이 된다.
전승일의 작품 중에서 가장 난해하다고 할까. 언뜻 한번 보아서는 무슨 말인지 알기 힘들다.
물론, 이전 작품들에서 등장했던 이미지들이 여기서도 반복적으로 드러나고 있어 익숙한 요소들이 있기는 하지만, 몇몇 새로 등장하는 이미지들을 따라가며 생각을 좀 해볼라치면 영화는 이내 끝나버린 상태다. 그러나 4분이 채 되지 않는 이 작품을 다시 보는 것은 전혀 부담이 되지 않고, 그 사실은 날 위로한다. 이 작품에서도 역시 전쟁, 핵, 아이, 도시 건설의 모티프는 계속되고 있다.
먼저 타이틀이 뜨면서 시계의 째깍째깍하는 소리가 들린다.
시간의 흐름, 인간들의 역사를 탐구해 보겠다는 작품의 의도가 반영된 듯하다.
이어 진짜로 시간의 흐름이 보여진다. 해가 뜨고 달이 뜨고 세월이 흐른다.
마치 태초의 모습인 것도 같다. 그리고 태초에 인간의 눈이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이 보는 색이 있었다. 거대한 눈만 가진 인간의 몸뚱아리가 등장하고,
그들은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하늘을 유영하며 문명을 쌓아간다.
고인돌 모양의 제단 같은 곳에서 사냥을 하듯 창을 던지면 어느새 문자가 발명되고 눈은 더욱
커진다. 그런데 역시 문제가 곧 발생하고 만다. 또다시 도시가 건설되는 것이다.
맑은 산천에는 어느덧 폐수가 흐르고 회색건물들이 쑥쑥 자라 맑은 하늘을 덮어버린다.
커다란 눈을 가진 인간의 모습을 한 그것들은 머리를 건물에 찧고는 땅으로 떨어져 버린다.
그리고 어느새, 그 회색의 건물들은 미사일로 변해있다. 인간들이 또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이런 그림들 위로 원시 시대의 창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것으로 봐서 이런 전쟁은 요즘 시대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문명은 곧 전쟁의 다른 이름일 수 있으며,
인간은 문명을 건설했고 그래서 전쟁이 일어났으며, 그것으로 서서히 파멸해 갈 것이라는 얘기다. 이제 그 고인돌 모양의 제단 같은 곳은 모니터처럼 기능하며 전투 폭격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세상은 모니터들의 천국이 되었다. 여기저기 티브이 속의 칼라바가 보이고 그 위로 디지털 문자들이 찍히며 각각은 전쟁을 생중계하듯 보여주고 있다.
역시 그들 위로 원시시대에 던진 인간의 창들이 계속 날고 있다.
이런 혼란에 종지부를 찍는 것은 역시 핵폭발이다.
핵폭탄이 터지고 거기서 피어오르는 버섯구름이 아이들이 먹는 사탕처럼 변하면서 끝맺음을 하는데이 위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 아이의 울음소리는 고통의 울음소리일 수 도 있겠지만, 새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희망의 메시지일 수도 있다. 모조리 다 폐허로 만들어 버리고 그 폐허 위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말인가? 설마 그것은 아닐테지만, 그것도 재미는 있겠다.
아무튼 마지막의 그 핵폭발 장면은 <내일인간>의 마지막 장면하고 연결되며,
그의 다음 작품인 <사랑해요>의 첫 장면으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순환>은 처음에는 언뜻 관념적이고 명상적인 작품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곧 여지없이 현실의 개입을 받는다. 반복되는 역사에 대한 회한도 느껴지는데,
전쟁의 모습들이 실사 다큐멘터리 장면으로 보여진다.
이제는 보다 직접적으로 전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다음 작품인 <사랑해요>에서는 그 역사의 모습이 아이들의 그림과 대비를 이루며 매우 극단적으로 보여진다.

<사랑해요>, 97년

위에서 먼저 밝혔듯이 이 작품은 핵폭탄의 버섯구름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위로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선언의 목소리가 깔리는데, 이 작품은 그러니까 해방 이후의 역사를 더듬을 모양이다. 우리의 해방이 핵폭탄의 폭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를 상징하고 있다고도 하겠다. 얼마나 고된 역사였던가.
8분 정도의 비교적 짧은 작품이지만, 이 작품은 사이사이 검은 화면에 비오는 듯한 화면들로 잘게 나누어져있다. 우리의 역사는 하나의 일관성을 잃은 막가는 난장판의 단절된 역사였음을 보여주는 것도 같다. 아무튼 이 작품으로 작가가 주목한 것은 그 각각의 우리 현대사가 남긴 무수한 양심수들이다. 그 양심수들은 가족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가족들은 우리의 이웃인 것이다.
전쟁과 폭력의 역사 속에서 양심들이 겪는 고통에 시선을 두는 것이다.
작가는 이제 거기에 관심을 두고, 표현하는 방법은 이전 작품들과 동일한 연장선 상에 놓여 있다.
그 양심수들의 자녀가 그린 그림을 통해서 우리의 아픈 기억들을 독특하게 되살리고 있다.
실제 아이들의 그림에 작은 움직임들을 줘서 표현한 이 작품은 실제 다큐멘터리 장면과 아이들의 그림을 교차편집하여 독특한 효과를 내고 있다.
다큐의 장면들은 극단의 폭력 현장과 한국전쟁, 군사혁명을 지나 광주로까지 이어지는데,
이것들이 아이들의 그림들과 대비되면서 새로이 환기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그림은 슬프다. 그 중 하나는 철창에 갇힌 나비가 우니, 옆의 꽃이 울고, 또 나무도 울고, 급기야 저 뒤의 산마저 우는 것이었다. 이런 슬픔의 원인을 작가는 광폭한 역사에 묻고 있는 것이다.
가족과 만난 양심수 주위로 철망이 사라지면서 끝나는 이 작품은, 그가 아트디렉터와 편집자로 참여한 <千人>이라는 작품에서부터 그 문제의식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1999. 3 / 이정수 (thisbug@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