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두 번쯤은 이웃이나 주변에서 내는 소음 때문에 괴로워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단편애니메이션 <어느 범죄 이야기>는 이러한 상황에 처한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한 남자가 몰래 두 여자에게 다가가서 들고 있던 그릇으로 내려친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남자는 경찰에게 체포된다. 남자는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영화는 사무실에서 근무를 마치
고 아파트로 돌아온 남자의 잠들기 전까지의 하루 일과를 몇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차례로
보여준다.

<어느 범죄 이야기>는 애니메이션 비평가이자 영화제 프로그래머인 오토 앨더(Otto
Alder)의 1시간 분량 다큐멘터리 <천재의 영혼 - 페도르 키투르크(Fyodor Khitruk)>를 통
해 그의 작품은 '절대적인 걸작', '선(善)의 인간적 구현'이라고 칭송된 바 있는 러시아 애니
메이션의 거장 페도르 키투르르의 1961년 감독 데뷰작이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던 1917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 에이젠슈타인 영화들을 보면서 성장
한 페도르 키투르크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자극을 받아 일찍이 20대부터 소유즈멀트필름에
서 애니메이터로 활동하였는데, 디즈니 스타일에서 탈피하여 러시아 특유의 영상미와 차별
적인 내용의 애니메이션 전통을 세우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이반 이바노프 바노(Ivan
Ivanov Vano)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바노프 바노는 시적 영상미로 유명한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만든 유리 놀슈타인의 스승이기도 하다.

동구권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가운데 하나인 소유즈멀트필름 최초
의 성인용 애니메이션으로 알려져 있는 <어느 범죄 이야기>는 평범한 한 남자가 여자 두
사람을 내려치는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키투르크는 작품에서 러시
아 구성주의 예술운동의 영향으로 보여지는 평면적이고 단순하게 처리된 배경, 인물마다 개
성적이고 전형화된 캐릭터, 리미티드 프레임으로 연출된 동작과 움직임 그리고 적절한 실사
영상의 활용을 통해 무게있고 진지한 주제를 날카롭고 재치있게 풀어낸다. 공존을 위한 이
웃 간의 배려와 이해가 갖는 현대사회에서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러시아 애니메이
션의 새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이후 러시아 애니메이션은 다양하고 풍부한 표현
으로 사회적인 주제들을 다루면서 독립적인 영화 형식으로 점차 발전하게 된다.

키투르크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람들 삶의 크고 작은 기쁨과 고통을 섬세하게 이해하였
으며, 애니메이션을 여타 예술적 영역들보다 더 큰 정치적 영역을 제안하는 하나의 예술 형
식으로서 받아들여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독재화된 국가 사회주의가 아
닌 '인간적 형태의 사회주의'를 진지하게 실천한 예술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ASIFA 공동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한 키투르크는 칸느, 라이프찌히, 뉴욕, 베니스, 오버하
우젠 등 수많은 페스티벌에서 수상하였으며, 96년 오타와 애니메이션 페스티벌과 2002년 히
로시마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회고전이 열렸고, 한국에서는 2002년 전주국제영화제 애니
메이션 비엔날레에서 특별전이 마련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DVD로 국내 출시된 <Masters
of Russian Animation - Vol. 2>에서 만날 수 있다.

2004. 1. 25 / 애니메이툰 4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