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국 독립 애니메이션 발전의 한 영역으로 공공(公共) 애니메이션을 제안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쓰여졌으며, 이론적인 개념 정리보다는 국내외 공공예술 프로젝트 사례를 살펴봄으로써 독립 애니메이션의 공공예술로서의 발전 가능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국내 최초의 옴니버스 인권영화'

지난 9월, 국가인권위원회는 '국내 최초의 옴니버스 인권영화 프로젝트'를 기획, 제작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인권영화 프로젝트는 국가인권위원회법이 명시하고 있는 '차별'의 유형인 성별·종교·장애·나이·사회적 신분·출신 지역·출신 국가·출신 민족·신체조건·혼인 여부·임신 또는 출산·가족상황·인종·피부색·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성적 지향·병력 등 18가지 유형의 '차별'을 소재로 10∼20분 분량의 단편영화 6편으로 구성·제작될 예정이고, 내년초 완성된 후에는 하나로 묶어 극장개봉도 추진한다고 한다. 현재 편당 5천만원 정도의 예산으로 제작되고 있는 이 인권영화 프로젝트는 여균동, 박찬욱, 정재은, 박진표, 임순례, 박광수 감독이 각 편의 연출을 맡아 제작하고 있다.
이 인권영화 프로젝트 기획의 계기는 1991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에 전해진 인권영화 단편모음 <잊지 않기 위하여>(CONTRE L'OUBLI)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에서 기획·제작된 <잊지 않기 위하여>는 장 뤽 고다르, 알랭 르네, 코스타 가브라스 등 30여 명의 유명 감독들이 참여한 다큐멘터리 단편 옴니버스 영화로 그 중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한국의 양심수 김성만에 대한 단편은 <계엄령>, <Z> 등의 정치영화를 만들었던 코스타 가브라스가 만들었다.

대안적 미술로서의 공공예술(Public Art)

'공공예술(혹은 미술)'이라는 용어는 프랑스 파리의 '68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당시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 공동체적 가치를 찾는 노력이 모색되던 무렵 영국인 존 윌렛이 1967년 『도시 속의 미술(Art in a City)』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화상, 큐레이터, 평론가, 컬렉터 등 소수의 전문가만이 소유하는 고급미술의 유통구조를 비판하고, 민주적인 문화 소비를 활성화하는 대안으로 일반인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정서에 개입할 수 있는 미술의 개념으로 공공미술을 공공미술의 개념을 제안했다.
미술에 있어서 공공예술은 '스튜디오 아트나 갤러리 아트에 대한 대칭개념으로 공식화한 뮤지엄 및 갤러리 중심의 주류미술 또는 상업주의적 미술에 대한 대안적 미술(Alternative Art)의 개념'으로 쓰여왔다.
국내의 경우 지난 2001년 8월, 지금까지 공공미술에서 '일부 비양심적인 미술인들과 건축주, 해당 공무원과 미술 중개상등에 의해 담합과 불법 리베이트, 과대한 수수료, 심지어 탈세와 매수가 성행'하고 있음을 비판하며, '공공미술의 의미를 생산하고 그 가치를 예술가와 시민, 전문가와 향수자 모두 공유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을 확대해나가 공공미술을 시민이 사랑하고 가꾸는 문화가 되도록 노력'하고, 공공미술이 '공공장소에서 예술을 매개로 행해지는 모든 감상, 소통, 기능, 참여 등으로 확장되어야' 함을 지적하면서, '하나의 시민운동이자 문화운동'으로서 '공공미술제도 도입을 위한 예술인협의회'가 출범하였다.
국내 공공미술은 전통적인 의미의 '장식'과 함께 '개입'(the participatory)의 개념을 강조하고 있는데, 개입은 미술작품을 단순히 미적 오브제로서의 제한된 기능으로 보지 않고 사회적 비판과 미술적 비전제시의 적극적인 표현매체로 사용함을 의미한다. 개입은 미술을 사회에 개입시킨다는 의미 이외에 작품의 제작과정을 중요시하고 그 과정에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다. 즉 일상생활 공간과 일상적 이슈에 대한 창의적 개입과 관람객의 소통적 참여를 공공미술의 중요한 개념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와우 프로젝트 일곱번째 <날아가는 돼지 문화열차>

어린이 인권 애니메이션 <Rights from the Heart>

<Rights from the Heart>(캐나다국립영화위원회, 1992∼1999)

1989년, 국제연합(UN)은 총회를 통해 어린이의 생존과 보호, 발달, 참여의 권리 등 어린이 인권과 관련된 모든 권리를 명시한 '국제 어린이 권리협약(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을 채택하였다. '국제 어린이 권리협약'은 어린이를 권리의 대상이 아닌 권리의 주체로 인식하였다는 점에서 어린이 관련 인권 조약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우리나라를 포함한 191개국의 비준을 받음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국가의 비준을 받은 국제법이 되었다.
<Rights from the Heart>는 '국제 어린이 권리협약'을 단편 옴니버스 형식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것으로 캐나다 국립영화위원회(National Film Board of Canada)에서 기획·제작하였으며 자크 드루엥, 미셀 포제, 브레티슬라브 포야르 등 세계 각국에서 20여명의 감독이 참여하였다. <Rights from the Heart>는 3부작(21편)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작품은 3분∼10분 분량으로 1999년에는 Channel Teletoon의 방송을 위해 5부작으로 재구성되기도 하였다.
국내에는 <희망으로 그리는 세계>라는 타이틀로 출시되어있다.


어린이 인권 애니메이션 <Cartoons for Children's Rights>

<Cartoons for Children's Rights>(유니세프, 1998 ∼ )

유니세프(UNICEF)는 1946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전쟁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던 세계 각국의 어린이들을 구호하기 위해 창립되었으며, 1980년대에는 개발도상국에서 대대적으로 아동의 생존을 위한 캠페인을 전개한 바 있는 국제단체이다.
1994년, 유니세프 커뮤니케이션 분과는 세계 곳곳의 뛰어난 애니메이션 작가들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Cartoons for Children's Rights>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국제연합에서 채택한 '국제 어린이 권리협약'을 30초 길이의 Spot 형식의 단편 옴니버스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는 것으로 30여개국 70여 개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참여하였고, 그 결과 100여편의 단편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었다.
아동노동, 전쟁, 난민, 가정환경 상실, 방임과 성적 학대, 유해한 노동과 착취로부터의 보호, 생존과 발전을 누릴 권리, 사상의 자유, 의사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 등 아동의 권리 문제를 담고 있는 <Cartoons for Children's Rights>는 유니세프 홈페이지를 통해 온라인으로 작품이 상영되고 있고, 비디오로 제작되어 배급되었으며, 'International Children's Day of Broadcasting'을 통해 전 세계에 방송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어린이 권리를 위한 만화 시리즈>라는 타이틀로 인권운동사랑방을 통해 배급되고 있다.


세계인권선언 애니메이션 <The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The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Amnesty International, 1998)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야만적인 범죄가 발생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8년 국제연합은 억압과 차별에 맞서는 방파제로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상세히 진술한 최초의 국제선언인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하였다. 세계인권선언은 인간의 권리와 근본적인 자유가 모든 사람과 모든 장소에서 적용된다는 내용을 세계 최초로 인정한 것이다.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는 1988년 세계인권선언 40주년을 기념하여 총 30조로 구성된 선언문 각 조항을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여, <The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라는 애니메이션 프로젝트를 완성하였다. 이 프로젝트에는 빌 플림튼, 퀘이 형제, 렌초 키노시타 등 세계 각국 30여명의 애니메이션 감독들이 참가하였으며, 각 작품은 2분 내외의 분량으로 페이퍼·셀·컷아웃·오브제·인형·점토·픽실레이션 등 다양한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국내에서는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지부에서 비디오로 배급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 애니메이션 <자갈치의 아침>

<자갈치의 아침>(부산시,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오돌또기, 미메시스 / 1999)

1999년, 부산시는 부마민주항쟁 20주년을 맞이하여 4.19민주혁명(1960)과 부마민주항쟁(1979), 6월 항쟁(1987)을 통하여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해 온 부산 시민의 민주정신을 기리고 널리 계승하려는 뜻으로 민주항쟁기념관, 야외공연장, 테마별 기념공간 등을 갖춘 복합공간으로 부산민주공원을 개관하였다.
부산민주공원은 부산의 과거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기림과 아울러 현재와 미래를 향하여 인간의 기본권과 행복추구권을 구현하는 인류 보편의 가치인 민주주의를 표상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되었고, 다양한 문화예술행사를 통해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를 교육하고 있다.
<자갈치의 아침>은 부산민주공원 상설상영용으로 기획·제작된 애니메이션으로 부산시,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오돌또기, 미메시스가 공동제작하였으며 20여명의 독립 애니메이터가 참여하였다.


독립 애니메이션의 공공예술로서의 가능성

예술 창작의 개인성과 사회적·공동체적 가치로서의 공공성의 조화 내지는 결합은 공공예술의 기본적인 출발이다. 독립 애니메이션은 예술에 대한 상업주의를 지양하고, 건강하고 대안적인 영상문화를 창출하는 것을 지향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독립 애니메이션에서는 개인의 예술적 성취 못지않게 사회적·공동체적 가치로서의 공공성의 성취 또한 중요한 것이다.
독립 애니메이션의 공공성은 작품의 소재 및 주제의 측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기획과 제작 그리고 소통의 영역에까지 이르는 문제이며, 이는 상업 지향의 애니메이션과는 다르게 좀더 각별하고 진지하게 접근되어져야 할 영역이다.
우리의 독립 애니메이션은 90년대 초 이러한 예술의 공공성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으며, 당시의 조건에 맞게 사회운동과 연대하여 미약하나마 애니메이션에서의 공공성 문제를 추구하고 성과를 쌓아왔다. 사회운동과 연대하여 작품을 창작하고 소통하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며 강조될 필요가 있는 주요한 방법론이다. 다만 특수하게 동시에 깊이있게 고려되어져야 할 것은 애니메이션이 갖는 영상매체로서의 '특수성'에 대한 것이며, 이를 위해 독립 애니메이션은 극장·TV·비디오·인터넷 등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어느덧 한국 독립애니메이션은 이제 1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고, 양·질적으로 다양한 발전을 해오고 있다. 또한 독립 애니메이션에 대한 공적 지원제도도 어느정도는 확대되었으며, 공공성에 기반한 영상미디어센터들도 여러 곳 생겨났다. 객관적인 조건은 10여년 전보다 일정정도 좋아졌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된 조건 속에서 '어떻게 새롭게 독립 애니메이션의 공공성 문제를 제기하고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이를 실천할 것인가?' 이며, 이는 전적으로 독립 애니메이터들의 과제일 것이다.

2002. 12. 9 / 계간 <독립영화 15호>(한국독립영화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