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용히 지나갔지만 우리는 몇 가지 사건을
떠올릴 필요가 있을 것 같다. MBC TV의 뉴스프로그램에 방송되었던 시사애니메이션 <박재동의
TV만평>과 KBS TV '정범구의 세상읽기'에 방송되었던 <조남준의 시사애니메이션>이 그것이다.
이 두 작품 모두 외압에 의해 제작이 중단된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또 이 '사건'에
대한 애니메이션계의 평가와 대응은 과연 있었던가?
<박재동의 TV만평>은 98년 8월부터
매주 뉴스시간에 방송되었는데, 안타깝게도 1차 계약에 해당하는 40회를 채우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1편당 평균 2분 30초 분량으로 제작된 <박재동의 TV만평>은 한국 애니메이션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시사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면서 시청자들에게 신선함과 통쾌함을 안겨주었다.
외국에서도 종종 방송용 시사애니메이션이 있었다고 하지만 2분이 넘는 애니메이션을 매주 뉴스시간을
통해 방송한 사례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제작이 중단된 99년 8월, 제작사인 오돌또기는
그동안 방송된 작품들을 모아 <정치야 맛좀 볼텨!>라는 타이틀의 비디오를 출시하였고, 동명의
책도 출판했다.
한편 이를 전후하여 <누들누드>, <고인돌>,
<69핑크 라이더스>와 같이 섹스를 코드로 하는 비디오 애니메이션이 잇달아 시장에 등장했고,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아마도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개씩 쏟아져 나오는 괴상한 제목의 에로비디오를
빌려 보듯이 이 애니메이션들을 선택할 것이고, 그래서 이런 스타일의 애니메이션은 당분간 지속될
것 같다.
또 한편 대표적인 독립애니메이터인 이성강
감독은 최근 <마리 이야기>를 통해 극장용 장편애니메이션에 도전하고 있다. 이성강 감독은 1년여에
걸친 데모작업을 통해 자본을 끌어 들이는데 일단 성공했고, 그동안의 개인작업에서 벗어나 30여명의
애니메이터들로 제작팀을 구축했다. 이 과정에는 전문 프로듀서의 힘이 컸다.
어쨌건 전체적으로 보면 성인들에게도 볼
만한 국산 애니메이션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2.
인터넷에 대한 한국의 열풍이 세계 몇
위안에 든다고 했던가! 지면이나 영상광고도 온통 '닷 컴'이니 'co.kr'로 뒤덮여 있고,
특정 분야에 대한 포털 사이트도 부쩍 늘고 있다. 연예인들은 앞다투어 인터넷 방송국을 만들고
있고, 모뎀으로는 조금 힘들지만 PC방이나 고속인터넷에서는 제법 그럴듯하게 인터넷 동영상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은 신문, 라디오, TV와 같은 매체가
우리 사회에 자리잡았던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TV가 수십 년이라면 인터넷은 불과
몇 년이다. 인터넷이라는 미디어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대중화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터넷은 이전의 다른 매체와 분명히 다르다.
그것은 인터넷이 디지털과 멀티미디어에 기반하고 있다는 측면뿐만이 아니라, 이전의 다른 매체가
갖고 있는 수동성과 일방향성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인터넷은 능동성과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을
보장하고, 통신과 방송을 새로운 개념으로 통합하고 있다.
인터넷을 사용하거나, 직접 사이트를 운영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다. 크게 보자면 상업적, 문화적, 정치적인 목적이 있을
것이고, 이들은 서로 명확히 분리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기도 한다. 인터넷을
어떤 목적으로 접근하건 그것은 상관없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인터넷을 자기 매체로 운영하는
데 목적이 불분명하거나, 그로 인해 다른 목적에 이용당하는 경우일 것이다.
인터넷에는 가치가 공존하고, 커뮤니티를
창출한다. 포르노를 즐길 자유를 주장하기도 하고, 이를 격퇴해야 한다고 떠들기도 한다. 한 사람이
대기업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도 있고, 동시에 여러 나라에서 공동의 행동을 취하거나 토론을
벌일 수도 있다. 서로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할 수도 있고, 자신의 모습을 생중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국가에서는 가능한 것이, 어떤
국가에서는 불법이기도 하다.
3.
필자가 독립애니메이션과 인터넷 방송을
연관시키게 된 데는 몇 가지 계기가 있다. 우선은 독립애니메이션의 재개념화 혹은 자기 반성의
문제이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독립애니메이션은 문화운동으로
출발했다. 문화운동은 삶의 형태와 질적 수준 나아가 이를 둘러싼 조건을 바꾸려는 운동이고, 여기에서
예술은 이를 고도로 집중시키는 한 형식이다. 그래서 예술운동으로서의 조건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주지의 사실이지만 현재 독립애니메이션은
독립영화의 전체적인 흐름과 일정하게 어긋나 있고, 몇몇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덕분에 활동의 방법론은
오히려 협소해진 느낌이다. 교류와 연대보다는 '대표성'에 관심을 갖고, 다양성과 실험정신보다
퀄리티와 이름값을 따진다. 그래서인지 인터넷에 대한 접근 관점이 배급이나 컨텐츠의 제공에 맞춰져
있는 것 같다.
한때 이런 기대도 해보았다. TV에서 국산
애니메이션의 시간쿼터제도가 확립되면 독립애니메이션도 당당하게 프로그램에 편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현재의 수준이라면 이 과정은 매우 복잡하게 진행될 것 같다. 방송사측과 독립애니메이션측이
어떤 단위로 만날 것이며, 성사될 경우 이를 과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인가? 요즘 생각은 EBS
<단편영화극장>이나 <애니토피아>와 같이 기획된 프로그램이 아닌 형식으로 독립애니메이션이 TV와
만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동시에 반문한다. TV가 독립애니메이션의 목적인가?
여전히 독립애니메이션은 '독립적인' 방식으로
'독립적인' 동네에서 할 일이 많다. 독립애니메이션은 상업적인 목적보다 자신의 생각과 동시대의
문제를 예술적으로 표현하는데 더욱 커다란 가치는 두는 애니메이션이다. 여기에 인터넷을 결합시켜보자는
것이다. 언론사의 애니메이션 사이트, 종합인터넷 방송국의 애니메이션 섹션, 애니메이션 전문 인터넷
방송국 등에서 자신의 독립애니메이션을 상영하는 일은 물론 필요한 일이고, 가능한 이러한 방식은
확대되었으면 좋겠다. 덧붙여 이러한 일들은 저작물의 사용이라는 측면에서 좀더 분명한 관계 속에서
진행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독립애니메이션이 인터넷
방송과 만나고 이를 운영하는 방법론에서 어느 한 가지라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 같다. 자신의
작품을 특정 회사에서 운영하는 사이트에 올리고, 이를 통해 약간의 상영료를 챙기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면, 그리고 독립애니메이션이 인터넷을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목적에서 접근한다면 우리는
좀더 많은 일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독립애니메이션은 페스티벌에 의존적이었다.
페스티벌이 독립애니메이션을 일정하게 활성화하는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페스티벌도 역시
독립애니메이션의 목적은 아니다. 문제는 지속적인 창작과 이를 뒷받침하는 환경의 구축이 아니던가!
게다가 페스티벌은 1~2년에 한 번 씩
열리기 때문에 작품을 발표하는 창구가 될 수는 있어도 작품이 대중과 안정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는 못한다. 독립애니메이션이 안정적으로 혹은 지속적으로 대중과 만날 수 있는 소통구조는
또한 대중매체에서 찾아야 한다. 인터넷은 이러한 의미에서 매우 유효하다.
4.
정리하자면 대략 이런 얘기가 될 수 있겠다.
먼저는 독립애니메이션이 인터넷을 어떤 관점에서
접근하고, 어떤 목적을 갖는가의 문제가 개념화되고 공유되어야 할 것이다. 이 부분에서 커다란
차이가 발생한다면 공동의 활동은 더 힘들지 않겠는가!
이와함께 독립애니메이션은 인터넷을 통해
작품을 상영 혹은 배급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인터넷은 TV나 비디오와
같은 다른 영상매체와 차별화되는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차별화된 요소를 간과한
인터넷 활동은 스스로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방식은 두가지 정도일 것이다. 하나는 기존
사이트에 작품을 제공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스스로의 독립적인 방송국을 구축하는 것이다. 여기서
방송이라는 의미는 작품을 창작하는 능력을 포함하여 사이트를 제작, 운영하는 기술 그리고 정기적으로
업데이트하는 활동 및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말한다.
기존 사이트에 작품을 제공하는 경우 비록
현재 저작권법 상에 디지털 컨텐츠에 대한 개념이 희박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저작물에 대한 이용권의
문제이기 때문에 일정한 원칙이 받아들여지고 또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이러한 일은
전문배급사나 프로듀서를 통해 원칙을 만들어 나가면 좋겠다. 그리고 작가들은 이를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이용권을 확보한 측은 이를 보호해야 한다.
한편 현재 독립애니메이션 내의 교류와 연대의
폭과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은데, 온라인 상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네트워크 혹은 커뮤니티를
만들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대표성'의 개념이 아닌 수평적 네트워크 혹은 소규모
전문 커뮤니티를 만들었으면 한다. 그리고 이 부분이 독립영화 전반의 온라인 네트워크와 어떻게
연관을 맺을 것인가도 함께 검토되어져야 할 것이다.
2000. 05. 21 / 전승일
(인디포럼 2000의 애니메이션 부문 세미나 발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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