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92년 미술대학 졸업작품으로 처음 단편애니메이션을 만든 이래 올해로 17년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오고 있다. 중간에 몇 차례 상업애니메이션을 한 적은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독립애니메이션을 하고 있다. 작년에 감독초대전 형식으로 개인상영회를 한 적이 있는데 장편애니메이션 분량으로 상영시간을 구성할 수 있었고, 재작년에는 1억 좀 넘는 제작비로 약 30분 분량의 작품을 만든 적도 있다. <오월상생>이다.

홍대앞 스튜디오를 정리하고 사는 집이 있는 일산 근처 좀 더 넓은 곳으로 작업실을 옮긴 후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단초는 지역시민단체, 지역공공문화예술기관 그리고 지역문화
예술교육과의 조우에서 비롯되었다. 몇 년 전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고양시는 한국전쟁 당시
경찰과 우익단체에 의해 수백 명의 민간인들이 무고하게 학살당한 아픈 역사가 있는 도시이다. 해마다 가을이면 금정굴에서 합동위령제를 하는데 작년에는 애니충격전 친구들 도움을 받아 해외 단편 애니메이션 상영을 고양어울림누리에서 할 수 있도록 연결시켜 주었다. 제대로 된 영화제도 아닌 작은 상영회였지만 그렇게 나는 조금씩 ‘지역문화예술활동’을 배워나갔다.
올해는 그 곳에서 ‘평화인권예술제’를 내가 직접 기획하여 진행할 것이다.

또한 작년 한 해 동안 나는 지역시민단체, 지역아동센터 분들과 함께 초등학생 대상의 애니메이션 교육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해보는 기회를 가졌다. 대개 저소득 취약계층 가정의 아이들이었고, 애니메이션 교육은 처음 받아보는 상황이었다. 지역내 애니메이션 교육을 위해 몇몇 전문예술가들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었고, 우리 또한 ‘낯선 여행’을 아이들과 함께 떠났다.
그리고 작고 미세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실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처음에는 정말 까칠하기가 이를 데 없던 아이들이 마지막 발표회 때 울먹이기도 하고, 몰래 와서 허리를 쿡쿡 찌르며 선물을 내밀기도 했다. 뭘까? 무엇이 변화한 것일까?

어떤 통계자료를 보니 현재 대학에 있는 문화콘텐츠관련학과 중 21%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라고 한다. 1990년에 최초로 만화학과가 생긴 것을 떠올려보면 놀라운 숫자이다. 또 몇 년 전 어느 문화재단에서 시행한 경기도 문화예술인 실태조사를 보았는데 58.5%가 문화예술활동
으로 인한 소득이 월평균 50만원에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또한 놀라운 수치이다.
그런데 이 조사에 애니메이션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독립 애니메이터들은 아무도 경기도에
살고 있지 않은 것일까?

최근 아르떼 예술강사 풀을 통해 수백 명의 만화·애니메이션 교육인력이 형성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지하듯이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은 완고하게 몇 십 년째 ‘문화예술’이 아니었던 상황을 돌이켜볼 때 반갑고 고무적인 일이다. 마케팅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필립 코틀러에 의하면
기업경영과 예술경영의 다른 점은 “기업경영은 한정된 돈과 인적·물적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돈을 어떻게 ‘버는가’가 본질이라면, 예술경영의 본질은 주어진 미션을 달성하기 위해 돈과 인적·물적 자원을 어떻게 ‘잘 쓰는가’에 있다”라고 한다. 다시 불어 닥치고 있는 경제 위기에
대한 극복을 문화예술인들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지역 공동체 그리고 소외계층과 함께 하는 즐거운 작은 변화, 애니메이션은 여기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딘지 잘 알 수 없는 곳으로 내몰린 수많은 독립 애니메이터들과 새롭게 형성된
만화·애니메이션 분야 예술강사들이 당분간 깊이 성찰해야할 주제이다.

작년에 지역아동센터에서 만났던 4학년 여자아이 시 한 편 소개하며 정리해본다.

   알지두 못하면서
   아빠는 엄마랑 같이 덩달아 잔소리
   선생님은 잔소리 덤에다가 회초리까지

   알지두 못하면서
   언제는 잔소리하기 전에 회초리 치기 전에
   왜 그랬냐고 물어보기라두 했나?

   알지두 못하면서
   대들면 더 혼나고 자기가 나이 더 높으면 다인가?

2009. 1 / 한국화예술교육진흥원 예술강사연수 특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