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동그라미 하나가 두 개로 갈라지고 꿈틀거리면서 생물로 변한다. 이들은 서로 먹고 먹히고 모습을 바꿔가면서 진화해나간다. 사람의 형상에 도달해서도 칼과 창을 휘두르고, 총과 대포를 쏘며 서로 대립하고 투쟁한다. 결국 군대와 문명세계는 거대한 폭발로 이어진다.

작은 구슬들의 프레임 바이 프레임 작업으로 환상적인 메타모포시스를 보여주는 <구슬 게임>은 인도 출신으로 캐나다 국립영화위원회(NFBC)에서 활동한 아트 애니메이션의 대표적인 작가 이슈 파텔(Ishu Patel)의 1977년도 작품으로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에 노미네이트(당시 수상작은 코 회드먼 감독의 <모래성 The Sand Castle>)되었던 작품이다.

<구슬 게임>은 인도 정부가 핵폭탄 실험을 한다는 사건에서 착안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수많은 색 구슬들이 뭉치고 흩어짐을 반복하면서 생물체를 형성하고 진화하면서 인간에 이르기까지의 생명 진화와 전쟁의 역사를 이미지의 변형과 인도 특유의 타악기 사운드와의 결합을 통해 환상적이고 충격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정교한 펜촉으로 작은 구슬들을 일일이 움직이고 흩트리면서 새로운 형상과 색채를 창조한 이러한 애니메이션 기법과 표현 영역은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혁신적인 것이었으며, 영화의 엔딩 부분에서 이 모든 파국적인 결말을 막아낼 수 있는 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전달한다.

빛과 색채의 연금술사로 불리우는 이슈 파텔은 1942년 인도 태생으로 스위스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사진작가와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하였으며, 1971년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캐나다 국립영화위원회에 들어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인도의 신화와 철학을 바탕으로 줄곧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를 작품에 담아왔는데, 특히 힌두교의 윤회설에 기반한 신비주의적 내세관과 동양적인 이미지와 색채의 결합, 종이·구슬·유리·점토 그리고 빛을 활용한 실험적인 기법을 통해 매 작품마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애니메이션 세계를 구축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이슈 파텔은 인도 전설을 토대로 신과 인간 그리고 지구와 우주의 기원을 표현한 첫 번째 작품 <죽음의 기원 How Death Came to Earth>(1971)을 시작으로,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도형들의 애니메이션인 <퍼스펙트럼 Perspectrum>(1974), 점토를 투과하는 빛의 촬영으로 영혼의 여행을 신비롭게 표현한 <사후세계 Afterlife>(1978), 피지배자의 권리와 개념을 풍자적으로 그려낸 <최우선권 Top Priority> (1981), 까마귀와 공작새의 이야기를 통해 허상과 진실의 세계를 표현하여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후보작으로 올랐던 <파라다이스 Paradise>(1984), 그리고 인간의 탐욕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은 <거룩한 운명 Divine Fate>(1993) 등 지금까지 15편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으며, 베를린 영화제·몬트리올 영화제·바르셀로나 영화제·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등 수많은 영화제에서 수상한 바 있다.

창조적이고 예술적인 마인드가 애니메이션의 근본임을 강조하고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이를 진솔하게 증명하고 있는 아트 애니메이션의 대가 이슈 파텔, 국내에는 그의 대표작 6편이 담긴 '이슈 파텔 애니메이션 베스트 콜렉션'이라는 DVD 타이틀이 출시되어 있다.

2005. 7 / 애니메이툰 5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