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젖을 빨고 있는 아기. 마을축제에 흐르는 탱고 음악의 선율. 전쟁터로 나가는 사람들과 남겨진 여인네들. 텅빈 식탁과 날아드는 전사통지서. 혼자 노는 아기 늑대. 눈덮힌 공원에서 사과를 먹는 아이. 평화로운 어촌마을을 지나가는 나그네. 작은 보자기에 쌓인 아기를 돌보는 아기 늑대.....

1980년 자그레브와 오타와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바 있으며, 애니메이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영상시로 손꼽히는 러시아 애니메이션의 거장 유리 노르슈테인(Yuri Norstein)의 걸작 <이야기 속의 이야기>. 이 작품은 내러티브 전개방식이나 직설법이 아닌 다양한 은유와 상징, 전편에 걸쳐 흐르는 러시아 민요와 클래식 음악, 그리고 시적 영상과 몽타주로 감독 자신이 어린 시절 경험한 전쟁의 상처와 아픔을 애절하게 담아내고 있다. 특히 멀티플레인 방식으로 촬영된 영상은 컷-아웃 애니메이션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풍부한 질감과 깊이를 표현하고 있다.

1941년에 태어난 유리 노르슈테인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소유즈멀트필름에서 애니메이션 과정을 수련하고, 1968년 A. 츄우린과 공동으로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을 다룬 단편 애니메이션 <25일, 첫날>을 통해 애니메이션 작가의 길로 들어섰으며, 그의 스승이자 러시아 애니메이션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이바노프 바노와 공동으로 애니메이션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70미리 시네마스코프 영화로 제작한 <케르제네츠 전투>(1971)을 통해 컷-아웃 애니메이터로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본격적으로 창출하기 시작했다.

<케르제네츠 전투>는 과거 키에프 공화국이 스라프 지방의 국가통일을 이루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침공에 맞서 투쟁하는 러시아 민중들의 모습을 통해 반전과 평화에 대한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람스키 코르사코프의 음악에 맞춰 숨가쁘게 전개되는 화면, 사건의 주체가 아닌 결과만을 보여주는 ‘수동태형 몽타주’ 기법, 전통 프레스코화를 응용한 질감이 풍부한 컷-아웃 이미지로 연출된 역동적인 움직임 등 유리 노르슈테인 특유의 기법과 연출로 전쟁의 비애와 평화에 대한 갈구를 보여주고 있다.

그 후 유리 노르슈테인은 자그레브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여우와 토끼>(1973),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등 다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한 <왜가리와 학>(1974), 테헤란 아동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안개에 쌓인 고슴도치>(1975) 등 러시아 우화에 토대를 둔 작품들을 연이어 만들면서 애니메이션 작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게 된다.

프레드릭 백, 얀 슈반크마이에르 등과 함께 애니메이션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감독 가운데 한 명인 유리 노르슈테인. 그는 최근 일본에서 기획되어 세계 각국의 독립 애니메이터 36명이 참여하여 제작된 ‘렌쿠’ 옴니버스 애니메이션 <겨울날>에서 한 편의 에피소드를 맡아 연출하였으며, 현재 10년이 넘도록 차기작 <외투>를 준비하고 있다. 그가 지금까지 컷-아웃 애니메이션으로 그려낸 아름다운 시적 영상은 국내에서도 출시된 DVD 타이틀 <유리 노르슈테인 작품집>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

2005. 3 / 애니메이툰 5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