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클래식 음악과 애니메이션의 환상적인 결합을 창조해낸 <판타지아>(1940)는 수많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가운데 가장 순수하고 예술적인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예술에 대한 나치즘의 검열과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독일의 아방가르드 예술가 오스카 피싱거는 바하의 ‘토카타와 푸가’를 배경 음악으로 하는 이 작품의 유명한 오프닝 시퀀스 제작에 핵심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유럽의 예술가들은 전쟁의 광기와 파괴에 대한 증오와 냉소를 바탕으로 전통적 가치와 이성에 대한 신뢰를 부정하고 무의식을 해방시키고자 하면서 기존 예술에 대한 전복을 시도하였다. 이 새로운 예술운동인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는 영화와 애니메이션에 영향을 끼치면서 전위적인 작업으로 이어졌는데, 우리는 이를 아방가르드 영화 혹은 실험 애니메이션이라고 부른다. 실험 애니메이션에서 필름은 기록매체가 아닌 드로잉의 화폭이 되었고, 사운드는 무브먼트가 되었다.

실험 애니메이션의 선구자인 오스카 피싱거는 1900년에 태어나 일찍이 기술과 수공업을 몸에 익혔고, 이미 20대 초반부터 <Miscellaneous Experiment>, <Wachs Experimente> 등과 같은 추상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전위적인 예술가로서의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단순한 이미지와 사운드의 운율과의 조화를 절묘하게 추상적으로 표현한 <Studies>연작을 포함한 1930년대 그의 작품은 오늘날 MTV 뮤직비디오의 ‘원조’로 불리우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시각적 음악’, ‘운동하는 추상’, '절대적인 애니메이션(absolute animation)‘은 현실의 재현이 아닌 그로부터 분리된 순수한 이미지의 운동을 추구했던 그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 키워드이다.

또한 실루엣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술에 취한 상태에서 왜곡되고 변형되어 보이는 세계를 초현실적으로 표현한 ‘독일적 폭력에 대한 혐오와 명상’ <Spiritual Constructions>(1927), <판타지아>에서 ‘마법사의 조수’에 등장하는 빗자루들의 행진을 연상시키면서 동시에 분명 파시스트 집단에 대한 은유적 풍자로 보이는 광고 애니메이션 <Muratti Gets in the Act>(1934), 원래 파라마운트의 장편영화 삽입용으로 기획되었으나 의견 차이로 인해 독립 작품으로 제작된 기하학적 도형과 색상으로 교향곡의 구조를 시각화한 컬러 애니메이션 <Allegretto>(1936), 바하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과 함께 추상 회화가 그려지는 과정을 다양한 색상과 이미지의 운동으로 표현하여 브뤼셀 국제실험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Motion Painting No. 1>(1947) 등은 그의 수많은 단편 작품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2001년 전주국제영화제의 애니메이션 비엔날레를 통해 작품이 소개된 바 있으며, 미국 아이오타센터(iotaCenter)를 통해 그의 단편 애니메이션 18편을 담은 비디오 <The Films of Oskar Fischinger - Vol. 1 & 2>가 제작되었다.

2004. 11 / 애니메이툰 5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