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남자는 어느 날 밤, 산책 도중 폭행 당하는 이상하게 생긴 반인반수의 동물을 구해주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주인공은 음식도 주고 새처럼 보살피지만, 결국 집 안에 있는 음식을 모두 빼앗기고는 동물로부터 몰래 도망가는 처지가 된다. 놀랍게도 그 동물은 고대 신화에 나오는 탐욕의 신 ‘하르파’였던 것이다.

<하르파>는 벨기에를 대표하는 아트 애니메이션 작가 라울 세르베(Raoul Servais)의 1979년
작품으로 칸느 영화제에서 단편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한 바 있다. <하르파>는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탐욕의 신 ‘하르파’를 통해 우리들과 함께 살아가지만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로부터 갑자기 억압과 폭행을 당했을 때의 비극적이고도 부조리한 상황을 충격적인 영상으로 보여주는데, 실제 배우를 픽실레이션 방식으로 촬영한 후 영상에 색을 덧입히거나 배경과 합성하는 그의 특유의 기법인 ‘세르베 그래피’를 선보인 작품으로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미학적 외형이
질적으로 변화된 대단히 중요한 작품이다.

1928년 벨기에 오스텐트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그는 켄트 예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한 후 화가로 활동하다가, 60년작 <항구의 불빛 Harbor Lights>을 통해 본격적으로 애니메이터로서의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주로 자유, 평화, 정의에 대한 갈망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작품을 통해 인간을 위협하는 편견과 권위주의에 대하여 경고하면서 현대사회의 어두운 일면과
관료주의가 낳는 부조리를 특유의 이미지로 영상화하는데 주력해왔으며, 각종 영화제에서
40여 차례나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세르베는 1985년부터 1994년까지 국제 애니메이션영화 협회(ASIFA)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애니메이션 예술의 국제적 위상을 확립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고, 애니메이션 전문 교육기관과 재단 등을 설립하여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는데 힘을 기울여 왔으며, 현재 80세에 가까운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에 대한 투철한 실험정신과 창의력으로 인간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냉철하고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는 작가이다.

또한 그의 65년작 <크로모포비아 Chromophobia>는 당시 유일한 애니메이션 전문 영화제인
안시 페스티벌에서는 낙선하였지만 몇 달 후 베니스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여 그의 국제무대 진출의 신호를 알린 독특한 이력의 작품이기도 하다. 독재자의 규칙을 강요하고 현존하는 모든 다양성을 제거하려는 사악한 침략군에 맞서는 소녀와 어릿광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교묘하고 즉흥적인 움직임과 음악으로 억압과 공포를 효과적으로 묘사하였으며, 궁극적으로
자유정신이 승리한다는 것을 기하학적으로 취급되고 연출된 다양한 상징과 색깔들을 통해 세련되게 표현하고 있다.

그 후 그는 <사이렌 Sirene>(1968), <골드 프레임 Goldframe>(1969), <말하느냐, 마느냐
To Speak Or Not To Speak>(1970), <오퍼레이션 X-70 Operation X-70>(1971), <페가수스 Pegasus>(1973), 장편 <탁산드리아 Taxandria>(1994), <밤의 나비 Nocturnal Butterflies>
(1998), <아트락션 Atraksion>(2001) 등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통해 자유에 대한 갈망과 권위주의에 대한 경고라는 주제 의식을 일관되게 표현하고 있다.

그의 독창적인 단편 애니메이션들은 일본 파이오니아에서 <Raoul Servais - A Master of Belgian Animation>라는 DVD 타이틀로 출시된 바 있는데, 아쉽지만 국내에서는 당분간 아톰필름(www.atomfilms.com) 사이트를 통한 스트리밍 동영상 감상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라울 세르베 작품에 대한 정보는 AWN (www.awn.com/gallery/servais & showcase.awn.com)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004. 7. 16 / 애니메이툰 50호